
계약 결혼으로 취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 비현실적으로 들리시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2016년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보고 나니, 이게 단순한 로맨스 코미디가 아니라 취업난과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리얼한 생존 전략을 다룬 작품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넷플릭스에서 밤새 정주행하게 만든 이 드라마는, 시청률 20.8%를 기록하며 일본 사회 문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줄거리: 계약 결혼이라는 고용 형태, 그리고 취업난의 현실
드라마의 주인공 모리야마 미쿠리는 심리학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규직을 구하지 못하고 파견 사원으로 일하다 계약 종료 통보를 받습니다. 여기서 '파견 사원'이란 기업이 필요할 때만 단기로 고용하는 비정규직 형태를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이런 고용 형태가 급증했습니다. 미쿠리는 백수가 된 후 아버지의 소개로 IT 엔지니어 히라마사의 집에서 주 1회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하지만, 부모님의 이사로 인해 이마저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미쿠리가 제안한 것이 바로 '계약 결혼'입니다.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려 풀타임 가사도우미로 고용되고, 히라마사는 안정적인 가사 서비스를 받는 일종의 고용 계약인 셈이죠. 두 사람은 버스 안에서 급여, 근무 시간, 업무 범위까지 꼼꼼하게 협의하며 최종 계약서에 서명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요즘 MZ세대가 말하는 '워라밸'이나 '직장 내 명확한 업무 경계'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2024년 기준 한국의 청년 체감실업률은 20%를 넘어섰고, 일본 역시 비슷한 상황입니다(출처: 통계청). 대학원까지 나와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은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역시 구직 활동 당시 '스펙은 쌓였는데 일자리는 없다'는 막막함을 경험했기에, 미쿠리가 계약 결혼이라는 비상수단을 선택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드라마는 이를 통해 고용 불안정성과 경제적 자립의 어려움이라는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미쿠리가 겪는 또 다른 현실은 '치과 치료비' 문제입니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거액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히라마사의 동료에게까지 가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쉐어'를 수락합니다. 여기서 '쉐어(share)'란 한 명의 가사도우미가 여러 가구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유 경제 모델을 의미합니다. 이는 최근 한국에서도 각광받는 긱 이코노미(Gig Economy), 즉 필요할 때마다 단기 계약으로 일하는 경제 형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35년 솔로 남자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
히라마사는 35년간 연애 경험이 없는 '프로 독신남'입니다. 그는 일과 독립적 생활에만 집중하며 감정적 교류를 최소화해왔는데, 미쿠리와의 계약 결혼 이후 처음으로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회사 동료들이 집에 묵게 되면서 미쿠리와 같은 공간에 있게 된 밤, 그는 평정심을 잃고 밤잠을 설칩니다. 드라마는 히라마사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그는 미쿠리를 피하기 위해 야근을 자처하지만, 정작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날 밤의 감정만 떠올립니다. 이런 모습은 감정 표현에 서툰 한국 남성들, 특히 연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의 심리와 정확히 겹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애착 회피형'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떠올랐는데, 여기서 애착 회피형이란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고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히라마사가 특히 동요하는 순간은 미쿠리가 회사 동료 카자미를 칭찬할 때입니다. 카자미는 사교적이고 여성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타입인데, 히라마사는 자신도 모르게 열등감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으로 리얼했습니다. 평소 이성적이고 냉정한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흔들린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죠. 드라마 후반부, 미쿠리는 히라마사에게 "두 사람의 어색한 관계 때문에 가사 업무가 힘들어졌으니 차라리 애인 관계가 되자"고 제안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미쿠리의 심리학 전공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문제 해결 중심 접근법(Solution-Focused Approach)'입니다. 쉽게 말해 과거의 원인보다 현재의 해결에 집중하는 심리치료 기법이죠.
남녀 주인공의 결혼
주연 배우인 호시노 겐과 아라가키 유이의 케미스트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호시노 겐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인데, 제 친구는 그의 콘서트를 찾아갈 정도로 열성 팬이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두 사람은 실제로 드라마 촬영 이후 진지하게 만남을 가졌고 결혼까지 했다고 합니다. 드라마 속 계약 결혼이 현실의 진짜 결혼으로 이어진 셈이죠.
드라마에는 미쿠리의 이모인 유리도 인상적으로 등장합니다. 유리는 경력에 집중하며 결혼하지 않은 당당한 여성 캐릭터인데, 그녀의 대사와 상황을 보니 요즘 인기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 나오는 여성 출연자들이 떠올랐습니다. 결혼보다 자기 삶을 우선시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2016년 드라마에서도, 2024년 한국 예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드라마가 다루는 또 하나의 주제는 '낮은 자존감'입니다. 히라마사는 자신이 연애 시장에서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억누르는데, 미쿠리는 심리학 전공자답게 이를 분석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전 남자친구의 "너무 주제넘는다"는 말이 떠올라 입을 다뭅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전문 지식이 있어도 실제 관계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봤습니다. 제 경험상 이론과 실전은 정말 다릅니다.
정리하면, 이 드라마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취업난, 경제적 불안, 1인 가구 증가, 결혼 기피 현상 등 한국과 일본이 공통으로 겪는 사회 문제를 계약 결혼이라는 장치를 통해 풀어낸 작품입니다. 대학원을 나와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 돈 때문에 결혼을 계산하게 되는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 청년들에게 이 드라마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현실적인 공감대를 제공합니다.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티빙에서 시청 가능하니, 가볍게 시작했다가 저처럼 밤새 정주행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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