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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줄거리, 가족관계, 성장통)

by 쿠루룽 2026. 3. 12.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10대 로맨스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와이 슌지 감독이 얼마나 정교하게 사춘기 소녀들의 심리를 영상 언어로 번역했는지 비로소 보이더군요. 2004년 개봉한 <하나와 앨리스>는 단순히 풋풋한 청춘물이 아니라,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균열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두 소녀의 심리 변화를 미장센(Mise-en-scène)으로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화면 구성, 조명, 색감, 배우의 위치 등 영상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줄거리 - 거짓말이 만들어낸 심리적 균열

영화는 하나가 미야모토에게 시작한 '기억상실증 가스라이팅'을 중심축으로 전개됩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상대방의 현실 인식을 왜곡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 기법을 뜻합니다. 하나는 미야모토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회로 삼아 "나는 네 전 여자친구"라는 허구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분석하면서 흥미로웠던 건, 감독이 거짓말의 확장 과정을 마치 눈덩이처럼 시각화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미야모토가 하나의 컴퓨터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면서 의심이 시작되고, 하나는 더 큰 거짓말로 상황을 덮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와이 슌지는 이 심리적 압박감을 클로즈업 샷과 불안정한 프레임 구도로 표현했습니다.

 

앨리스가 전 여자친구 역할을 떠맡게 되는 과정도 주목할 만합니다. 영화 속 앨리스의 어색한 연기는 사실 배우 스즈키 안의 의도된 연기력 과시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연기에 서툰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네 번째 봤을 때야 이 점을 깨달았는데, 앨리스는 기획사 캐스팅을 받고 여러 오디션을 다니지만 계속 떨어지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서툰 연기는 곧 캐릭터의 한계이자 현실이었던 셈이죠. 청소년 심리 발달 연구에 따르면, 10대 중반은 자아 정체성 형성과 또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시기로, 이 시기의 거짓말은 단순한 기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 실험의 일부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하나의 거짓말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했고, 그 대가로 우정의 균열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와 앨리스의 가족관계

앨리스의 가족 관계는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이룹니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상징적 의미로 가득합니다. 앨리스가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만년필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관계를 만들 수 없다'는 메타포(Metaphor)로 작동합니다. 여기서 메타포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다른 이미지나 사물로 의미를 전달하는 은유 기법을 말합니다.

 

만년필은 즉석에서 쓸 수 있는 볼펜과 달리 잉크를 채우고, 펜촉을 길들이고, 사용자의 필압에 맞춰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화 속 앨리스와 아버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짧은 만남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려 애쓰지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관계입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들은 '부재'를 다룹니다. <러브레터>에서는 죽은 연인의 부재, <4월 이야기>에서는 닿을 듯 닿지 않는 감정의 부재를 그렸죠. <하나와 앨리스>에서는 아버지의 물리적 부재가 앨리스의 조숙함을 만들어냈습니다. 영화 속 앨리스는 "철없는 엄마 대신 먼저 철이 든 아이"로 묘사되는데, 이는 한부모 가정 청소년들이 겪는 역할 전도 현상과 일치합니다.

 

발레 장면들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아오이 유우가 종이컵을 신고 발레를 추는 장면은 영화의 핵심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발레는 완벽한 기술과 훈련을 요구하는 예술이지만, 종이컵이라는 불완전한 도구는 소녀들의 미완성 상태를 상징합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4년 당시 한국 청소년의 사교육 참여율은 83.1%였으며, 예체능 분야도 주요 사교육 항목이었습니다(출처: 통계청). 하나와 앨리스가 발레를 그만둘지 고민하는 장면은 당시 청소년들이 겪던 진로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와 앨리스의 성장통

영화가 보여주는 성장통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거짓말로 시작된 관계가 진실을 요구하는 순간의 혼란
  • 친구를 배신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사랑의 허상
  • 부모의 부재 속에서 스스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압박감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비 오는 날 장면에서 멈춥니다. 두 소녀가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이 말로 설명되지 않고 오롯이 빗소리와 표정, 침묵으로만 전달되는 그 순간이 이와이 슌지 영화의 진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다섯 번 넘게 봤지만, 여전히 새로운 디테일이 보입니다. 2004년 영화가 2025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10대의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일 겁니다. 청춘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 자체가 아름답다는 걸 이 영화는 담담하게 증명합니다.


 

참고: https://youtu.be/NtE3h3bNA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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